옷깃을 여미고 목도리를 하고 외투를 걸쳐야 제맛이 나는 계절,겨울이면 사람들은 제 각각의 외로움에 빠저들때가 많다.
밤 하늘을 보면서 별을 담고 싶은 깊은 밤에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詩 <별 헤는 밤 >속으로 들어가본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슬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鏡경,玉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노루,프랑시스 쟘,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뭇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11.5.)
※序 詩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1941.11.20.)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대 詩人은 1917년 12월 30일 (陰11.7)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윤영석尹永錫과 독립운동가인 김약연金躍淵 선생의 누이 金龍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詩人은 일제치하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만주 명동 소학교를 1931년 졸업,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교에 입학(16세) 1834~35년에<삶과죽음>
<남쪽하늘><창공>등의 시 작품을 쓰며 카톨릭 소년지에 <병아리><빗자루>등을 발표하며 창작에 몰두했다고 한다.
詩人은 1938(22세)년 광명 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며 스승이던 명희조明羲朝 선생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깨우치고,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이후 조선일보에 산문 <달을 쏘다.>를 발표.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일제에 의해 폐간당한다.
詩人은 25세 되던 해 1941년 <序詩> <또 다른고향>
<십자가> <별 헤는 밤>등의 원숙한 名詩들을 우리에게 남긴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사상범으로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구금된다.
위대한 민족시인의 죄명은 독립운동.28세 되던 해 3월 31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형의 언도를 받고 큐슈九州 의 후쿠오카 福岡형무소에 수감된다.
詩人은 감옥에서 일경에 의해 시체해부를 위한 방부제 주사를 강제로 맞은 것으로 전해지며,1945년 2월16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패망을 목전에 둔 일본에 의해 차디찬 감방에서 옥사, 序詩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마감한다.
송몽규 선생도 윤동주 시인의 사후 23일 만인 3월10일 옥사한다.
대한민국은 詩人이 떠난지 6개월 후에 광복을 맞이하지만 詩人은 간곳 없고 시인의 유해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아버지의 품에 안겨 돌아와서,가족들에 의해 만주의 龍井동산 산마루턱에 눈보라를 맞으며